–시간이라는 자산에 대한 우리의 태도–
우리는 입버릇처럼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기술의 발전으로 이동 시간은 단축되었고 가전제품은 가사 노동을 대신 해주지만, 역설적이게 현대인은 그 어느 시대보다 시간의 빈곤에 시달린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쓴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는 바로 우리에게 서늘한 죽비 소리를 들려주는 책이다. 그는 책의 첫머리에서 단호하게 선언한다. “인생은 짧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세네카의 이 일침은 현대인들에게 커다란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정말 시간이 부족한 것일까요, 아니면 무의미한 일들에 소중한 생명력을 지불하고 있는 것일까요?
세네카는 인간이 가진 기묘한 이중성을 꼬집는다. 누군가 내 돈이나 영토를 침범하면 결사적으로 저항하면서도, 누군가 내 시간을 빼았으러 오면 너무나도 쉽게 내어준다는 점이다. 돈은 다시 벌 수 있지만, 시간은 한 번 흘러가면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유일한 자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마치 무한한 샘물인 양 낭비한다.
그는 이를 **’분주함(Occupation)’**이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오늘날로 치면 끝없는 업무 연락, SNS의 파도, 영혼 없는 사교 모임에 매몰된 상태다. 세네카의 눈에 비친 이런 사람들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는 항구를 떠나자마자 폭풍에 휘말려 제자리에서 뱅뱅 돌다 돌아온 배를 보고 “긴 항해를 했다”고 말할 수 없듯이, 그저 나이만 먹은 삶을 “오래 살았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그는 묻습니다. “쉰 살, 예순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지혜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현재를 희생해 불확실한 미래를 사는 것은 인생을 통째로 허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현대인들에게 주는 가장 뼈아픈 통찰은 ** ‘미루는 삶’**에 대한 비판이다. 우리는 흔히 쉰 살이 되면 은퇴해서 여유를 즐기겠다”, “내일부터는 나를 위해 살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세네카는 묻는다. 그때까지 살 수 있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가장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가장 확실한 현재를 희생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가 제안하는 올바른 인생의 영위 방식은 ** ‘현재를 붙잡는 것(Praesentia)’**이다. 이는 단순히 쾌락을 쫓는 ‘카르페 디엠’과는 결이 다르다. 나 자신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고, 외부의 소음에서 벗어나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고요한 시간을 확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노는 것’이 아니며, 그는 ‘오티움(Otium)’, 즉 건설적인 여가를 강조합니다. 이는 자기 내면을 성찰하고, 과거의 위대한 철학자들과 대화하며 지혜를 쌓는 것을 말하며 우리가 고전을 읽고 철학적 사고를 할 때, 우리의 수명은 우리 세대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류가 쌓아온 수천 년의 지혜를 내 것으로 만듦으로써, 시간의 한계를 넘어 ‘영원’에 접속하게 됩니다. 이것이 인생을 확장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인생을 보람차게 만드는 방법으로 ** ‘철학적 사색’**을 권한다. 위대한 성현들의 지혜를 읽고 배우는 시간을 ‘참된 여가’라고 불렀다. 우리가 고전을 읽을 때, 우리는 우리 세대의 짧은 수명을 넘어 인류 전체의 역사와 지혜를 내 것으로 흡수할 수 있다. 제논과 대화하고, 피타고라스를 스승으로 삼으며 시간을 초월한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유일한 생명을 무한히 확장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시간을 아껴 쓰라는 자기계발서가 아니다. **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가’**를 묻는 존재론적 질문이다.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성취라는 감옥에서 걸어나와, 오롯이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을 봉헌하라고 조언 합니다.
인생은 결코 짧지 않다, 다만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소홀할 뿐이다. 책을 덮으면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오늘 내가 보낸 시간 중 진정으로 ‘나의 것’이었던 시간은 몇 분이나 되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당신의 남은 생을 결정할 것이다.